우리를 겸손케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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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8-25 16:33 조회3,237회 댓글0건본문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2007년 12월 07일(금요철야)
본문 / 고린도후서 12:7~10
누구에게나 타락의 근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타락의 근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는 죄성이 조금도 없으시지만,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하고, 은혜 가운데 살려고 해도, 타락의 근성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면 안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 3:1)”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 중에도 뱀같이 간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3장 3절에 보면,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암논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아들 중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은 너무 예뻤습니다. 큰아들이었던 암논은 한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자신의 누이동생 다말을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연애했는지, 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암논의 친구 요나답이 나쁜 짓을 하도록 가르쳐주었습니다. 아픈 척해서 자신에게 먹을 것을 먹여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갔을 때에 겁탈하고는 좇아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앙심을 품고 암논을 죽였습니다.
집안의 형제들 사이에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건의 계기는 간교한 요나답 때문입니다. 이런 간교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사탄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잘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도구가 되느냐입니다. 얼마나 잘 났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도구로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도구가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도구가 되면,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멸하는 짓을 하게 하다가 사탄과 함께 영원히 멸망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불행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못된 일을 하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망할 사람을 일으키고 깨어질 위기의 가정을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간교한 뱀은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거짓말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유도했습니다.
여자는 뱀에게 미혹되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고,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지만, 우리는 잠시 살다가 한 줌의 흙이 되어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자신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는 자신을 ‘Lord’라고 표현하여 신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오직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순교자가 많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놀라운 복음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한국 역시, 복음화 되려면, 죽을 각오를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화 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헤롯 왕이 백성들 앞에서 연설했을 때, 백성들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하며 헤롯을 신과 같이 대했습니다. 그 때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그날 밤에 충에게 먹혀죽었습니다. 성경이나 역사를 보면,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사한 사람 중에 제대로 산 사람이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절대로 교만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연단하셔서 온전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련과 연단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시련과 연단을 통해 우리를 겸손히 만드시고, 은혜 받게 하시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원래 고난은 범죄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정의 고통, 해산의 고통, 먹고 사는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종의 저주입니다. 그러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저주에서 속량 받았습니다. 우리는 죗값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저주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커서 다른 사도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교만한 인간이 될까봐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크게 머물러 자신이 더 크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약한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도하러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를 만났습니다. 총독 서기오와 함께 있는 중에 그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예수가 어떻게든 총독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행 13:10~11)”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루스드라에서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 14:10)”고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고 하니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이런 권능이 나타나지만, 계속 핍박이 있어서 맞고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돌로 유대인들이 쳐서 죽은 줄 알고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헐벗었습니다. 계속된 핍박으로 인해 그의 육신은 아팠습니다.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이 연약한 것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사도 바울은 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은 구원해도,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교만하지 않도록 쳐서 복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순교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사도 바울은 계속 편지를 쓰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으면 기독교의 신학이 잘 정립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고 갇혀있다고 일하시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임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남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권사님의 남편은 세상적으로 교만할 대로 교만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가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중병에 걸려 생사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많은 재산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지셨습니다.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육신의 질고가 그분께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재산을 쓰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 세상에 육체의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C.S.루이스에게 ‘인간에게 왜 고난이 많은가’ 질문했습니다. 그는 “고난마저 없다면 인간이 얼마나 교만해지겠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 의학, 생명과학 등이 아주 발달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병들면 그냥 죽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병을 고치려고 해도, 희한한 바이러스가 생깁니다. 아무리 항생제를 만들어도, 더 강한 균이 생겨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건강 관리를 잘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자다가, 운동하다가, 죽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우리는 그냥 죽습니다. 성도들에게 육체의 고난은 겸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고난이 올 때,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은혜를 주시고 치료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난을 주십니다. 돈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잠언 28장 11절에 보면,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인줄 착각합니다. 잘난척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해서 복 받은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사람도 실수와 허물이 많고 부끄러운 사람입니까. 돈 많은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돈이 많으면 유혹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방탕해지기 쉽습니다.
미국, 유럽은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방탕해져서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독일에서 시골길을 차로 지나가는데, 들, 산에 있는 집들이 사진에 나오는 집들같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회하면서 보니까 독일이 통일하면서 경제가 어려워져서 먹는 것은 한국보다 좋지 않았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잘 살면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으로 방탕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눅 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지 않으시면 부자는 타락하여 예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믿게 하시겠지만, 사람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과 재물이 우상이 되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 가난한 자가 예수님을 믿기 쉽습니다. 일본에서는 선교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남미에서는 전도하기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하심은 무엇보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5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 하나님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환난과 시련, 가난은 괴로운 것이지만 겸손을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다윗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도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해 연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일찍이 고통을 맛보며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20세에 왕이 된 후 전혀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누릴 수 있어서 기도하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육체의 고난, 물질적 고난을 맛보며 사는 것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고 더 큰 복을 받고 더 크게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실패를 주십니다. 여호수아 7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아이 성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것은
첫째, 아간이 여리고를 물리쳤을 때, 전투에서 승리해서 얻은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아간이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것
겸손한 자와 겸손하지 못한 자를 구별하는 것은 순종, 불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간이 불순종한 것은 그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절대 복종합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7~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에 보면,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역경을 허락하십니다. 요셉은 종이 되고 감옥에 들어감으로 역경을 경험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에서 그의 겸손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에서 그의 겸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는 감옥에서도 범사에 형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겸손히 하셔서 크게 축복하시고 쓰시려고 그에게 역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엎드리는 모습이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기도생활을 등한시 하시는 분들은 자신이 교만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보고 엎드려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다니엘 역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니엘은 우상 숭배할 때에 사용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겸손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물질의 고난, 육체의 고난, 역경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겸손을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지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홍해가 갈라지듯 우리 앞에 대로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며 사셨습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겸손해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말씀 듣고 은혜 받아 겸손해지면, 요셉이 총리가 된 것처럼 크게 쓰임 받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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