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로운 믿음의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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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7 13:28 조회3,268회 댓글0건본문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
2019년 05월 26일(주일예배)
본문 /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시는 등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훈련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대표라고 할 만큼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언제나 큰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도망가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나약하게 도망갔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하고, 충성하려고 하고,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해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너져버립니다. 버티지 못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스스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핍박이 없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가 있을 때에 참고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왜 피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곳, 복음을 기다리는 곳에 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공산화되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을 때, 끝까지 성전을 지킨 목회자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가 있다 해도 교회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교회는 굉장했습니다. 수천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북한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령 충만하고 믿음 좋은 성도들이 다 순교했다면, 복음이 쉽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당시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분들 중에 남한으로 피난오신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핍박을 피해 남한으로 오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다녔던 교회에도 많은 분들이 피난 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커졌습니다. 예배당이 꽉 차서 교회 밖에 긴 나무의자를 놓고 예배드렸습니다.
북한에서 핍박을 피해 남한으로 피난 오신 성도들로 인해 남한에 있는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한으로 오며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살려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 중에 남한에서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목회자가 된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당시 부산에도 교회가 몇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산에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핍박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비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여 사도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사도 바울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려 사도 바울을 피하게 했습니다.
붙잡히면 죽는 것이지만, 순교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많이 피해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제자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었다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9~21절에 보면,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것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가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다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 중 몇몇 사람은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안디옥교회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으로 인해 도망갔지만,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도망간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핍박을 피해 도망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헬라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안디옥교회는 점점 커졌습니다.
이들이 ‘우리는 죽어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도 없는 동네가 아직도 많습니다.
평생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 죽었다면,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제자들이 도망간 것은 비겁해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요?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고 믿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마가복음 15장,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0~51절에 보면,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리마대 요셉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다스리시는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옆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메시아시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한 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밤낮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세상을 걱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가 이 땅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집회를 인도할 때에도, 설교할 때에도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최선을 다해 최고로 잘 하려면,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우리가 먹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세상 일을 걱정하겠습니까. 가장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겼습니다. 왜 숨겼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교시키기로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면, 아리마대 요셉은 출교당합니다. 완전히 쫓겨납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숨겼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할 때에 그로 인해 교회가 다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천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러내어 예배드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겼을 뿐,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하 교회에서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더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교회는 없어지지 않고, 박해받기 전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숨어있는 성도라 해도, 거듭난 사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용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믿는 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박해를 받자, 평소에는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등소평 시대에 기독교를 개방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중국의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많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가기 원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려고 합니다. 중국 교회는 겉을 보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넉넉하게 삽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학교에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한국에서도 신학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도,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자유로우니 배가 불렀습니다.
북한에도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지하에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보통 신앙이 아닙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숨긴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대결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의 선지자가 엉터리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왕상 19:2)”고 말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겁이 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는 것을 본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이 7천 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핍박을 받아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핍박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깁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결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진실한 성도는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시므로 예수님과 함께 덩달아 이깁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있다 해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렸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던 고센 땅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온 땅에 재앙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던 고센 땅은 구분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환난의 때입니다. 고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분하시고 지키시고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과 함께하시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곳에는 교회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가 되고, 여러분이 사는 곳에 교회가 생기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작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순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아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작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걱정합니다. 불안해합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염려거리가 있어서 염려했는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믿음이 건강해지고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생기면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거리만 생각하면, 염려가 더 커집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둘째,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 급한 일, 큰 일이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목숨 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을 반드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습니다. 문제가 반드시 해결됩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셋째,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셨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저절로 영광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오면, 기도로 환난을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을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믿음이 약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는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맡은 군사들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일어난 일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옆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메시아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음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소원과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과 후손을 위해 마련한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출교 당할 것을 각오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9장 39~41절에 보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장례를 치를 때에 니고데모가 함께했습니다. 여기서 세마포와 향품은 귀족이나 왕이 죽었을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집도 땅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왕처럼 대접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지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역대하 6장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셔서 금, 은, 보화를 쌓아놓을 수 없을 만큼 많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크게 생각하시고 많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 시킬 만한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환난이 있어도 빛이 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믿음으로 살아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듣지 않게 하시고, 마음에 새겨서 실천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기적을 보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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