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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2장

믿음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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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5-03 11:14 조회5,6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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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

 

믿음과 사랑

2018년 04월 29일(주일예배)

본문 / 요한복음 12:1~11

 

교회에 열심히 나오셔서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은 훌륭한 성도요, 보배로운 성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도, 교회가 좋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좋고, 교회에 가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부자요,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부흥회를 하면, 부흥강사를 잘 대접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한 후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분이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제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 일을 잘 하니까 장로 직분을 받았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진실하게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참 양심적인 분입니다. 그 고백을 듣고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회자 중에도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마음대로 가감하여 가르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자요, 목회자요, 신학박사 중에도 성경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분별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1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읽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십일조헌금을 철저히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1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형식적인 행동일 뿐, 그 사람의 믿음은 아닙니다.

겉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것 같고, 훌륭한 일꾼인 것 같아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한 주 전에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한 주 전에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요한복음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1~2절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그때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서 잔치를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잔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실 때에도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사람들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매우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잘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잔칫집에 초대받으셔서 가신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목적으로 잔치한 것은 본문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행하셨습니까.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많은 일을 행하셨으니 은혜 입은 사람이 많았을 텐데,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목적으로 잔치한 것은 본문 요한복음 12장에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이 많은데,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요?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이 왜 생기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던 중에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는가를 보면, 내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환난 중에도 감사하는 사람, 고난이 있어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 대접 받으려고 합니다. 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혜에 보답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밤낮 축복해달라고 기도해서 잘 됐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병든 사람이요, 믿음이 약한 사람이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다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왜 병들었습니까?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8:1)”라고 말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더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15년은 히스기야의 시간입니까, 하나님의 시간입니까. 그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15년 연장 받은 시간 동안 자신을 위해 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시간이므로 그 시간 동안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에 보답하는 방법입니다.

 

역대하 32장 24~26절에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왕이 그러니 백성들이 왕을 닮아 그와 같이 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고, 하나님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마음이 교만해지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교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15년 동안 더 열심히 기도하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말씀으로 무장시켜서 믿음으로 훌륭하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므낫세는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았습니다.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예루살렘의 거리를 온통 피로 물들게 했습니다.

므낫세의 모습에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만큼 타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하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쓸데없는 짓을 합니다.

히스기야는 세상적으로 축복을 받고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잘못 살았습니다. 저는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15년 연장 받지 말고 죽는 것이 나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히스기야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려 하자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줄 아는가를 보면,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 1년을 일해야 살 수 있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비싸고 귀한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것은 마르다가 준비한 음식보다 예수님을 더 기쁘시게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자신의 머리털을 면류관처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게 길러서 머리털을 간수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마리아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들이 왔을 때에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겨드린 것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향유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존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믿음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면,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재산은 물론이요 목숨까지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돈 계산이 가장 빨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고, 그래서 그에게 돈 관리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도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짓을 자꾸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면,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들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마귀가 가인의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우를 죽인 것입니다. 사탄은 악합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에게서 빼앗습니다. 거짓말을 잘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재벌이라고 해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당합니다. 이보다 저주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을 본 가룟 유다는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고 말씀하셨습니다.

 

향유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용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한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역사적으로 귀한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자신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귀하게 여겨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말하며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리 돈을 허비하느냐고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난한 자를 생각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본래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돈 넣는 것을 훔쳐 가는 도둑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짓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계속 도둑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결국 돈의 노예가 되어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구제 사업을 하려고 할 때에 헌금을 많이 하며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일을 맡아 하며 돈을 빼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이 있는 곳에는 그런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태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교회는 구제 사업을 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구원 받게 하는 전도와 선교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구제 사업은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그 사람의 마지막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요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구제 사업을 해야 하지만,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구제 사업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지만, 가룟 유다로부터 비난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혼자 사시는 권사님께서 가사도우미로 일하셔서 번 돈 1천만 원을 성전 건축헌금으로 헌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자 성도들이 권사님을 비난했습니다. “저 늙은이가 자기도 먹을 것이 없으면서 1천만 원을 헌금했다고? 제정신이 아니네.”라고 하며 권사님을 비난했습니다.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복을 받는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비난도 받을 수 있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니 복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박해를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박해 받는 것을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장차 영광이 되고 상급이 됩니다.

 

로마서 8장 17~18절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5장 40~42절에 보면,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리아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위해 아끼지 않고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7~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하는 일을 말리지 말고 가만히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한 것이니 가만히 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어떻게 이렇게 악해졌을까요? 회개할 기회가 왔을 때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을 때에 겸손히 무릎 꿇고 회개했다면, 이렇게 악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욱 악해져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사탄은 회개하지 않게 합니다. 완악해지게 하고, 더 악해지게 합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완악해지고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대로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책망하시거나 깨닫게 하시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즉시 회개합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가 모두 도말됩니다. 그리하여 정결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구원 받지 못합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잃은 것이 다 회복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이 다 회복되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잔치했습니다.

 

요엘 2장 25~26절에 보면, “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즉시 회개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회개하면 용서 받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우편에 있던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외쳤습니다. 평생 강도짓을 하여 염치없지만, 그동안 한 번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회개하세요. “주여, 나를 용서하옵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회개하세요. 버림받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받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 마음에 새겨서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고, 승리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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