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친구 나사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3-07 13:45 조회3,503회 댓글0건본문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
2018년 03월 04일(주일예배)
본문 / 요한복음 11:11~16
성경에 보면, 나사로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나사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였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에 보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요 11:36)”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로는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나사로가 부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43장 1~2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곱아’라는 말은 ‘나의 택한 백성아’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3절에 보면,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사야 43장 4절에 보면,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최고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 보통 은혜입니까. 보통 사랑입니까. 그런데 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야곱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나병환자는 따뜻하게 해줘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는 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나병환자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 불행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남편이 소천하신 후 자신이 바느질을 하여 돈을 벌어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대학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대학교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놓고 엄마를 원망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원망 불평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장자와 처음 난 것을 모두 멸하실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사랑해주시고 돌봐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기쁨, 감사, 찬양이 넘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요,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모든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요, 복음을 믿고 구원 받아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에 가서 살게 되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모두 구원하여 천국에 가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아까워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원인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14~16절에 보면,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시지 않으실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어기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명예와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도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변함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밤낮 변덕을 부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깨달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뻐하고 찬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8~13절에 보면,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와 만물은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술이 점점 발달하여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별까지 천체망원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명왕성이 돌고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사는 지구는 아주 작은 행성입니다. 지구보다 더 큰 별이 우주에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크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를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주에서 아주 작은 별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은 미세먼지처럼 작은 피조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크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아브라함을 창조주 하나님의 친구의 반열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과 친구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인은 무언가를 할 때 종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종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종에게는 오직 지시하고 명령할 뿐입니다.
그런데 친구에게는 다릅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친구에게는 털어놓습니다. 친구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의논합니다.
창세기 18장 16~17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를 멸할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존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 성을 위해 중보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른 제자들을 가리켜 ‘내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6~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권세를 우리도 받습니다. 끝까지 승리하는 사람,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섭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립니다.
로마서 8장 17~18절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가리켜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장차 예수님과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좋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의 친구’라고 불리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것을 가리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나사로가 부활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든 것이라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라 판단하여 예수님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요 11:12)”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모두 부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죽었던 하나님의 자녀의 부활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의 부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하여 영생복락을 누리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도 부활하지 못합니다. 1천 년이 지난 후, 마지막 심판 때에 세상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고 영원히 지옥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부활합니다. 그런데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6절에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첫째 부활 때에 부활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죽음을 ‘잠’으로 표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 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의 몸은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는 다릅니다. 죽지 않는 몸, 영생하는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한 후에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거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가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 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다비다가 죽었을 때,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청년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었을 때, 사도 바울이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다시 살리기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보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욕심을 따라 기도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보면,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떤 믿음으로 기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사야 38장 1~8절에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15년을 보면, 히스기야가 믿음으로 기도하였는가 의심이 생깁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가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저를 더 살려주세요. 제가 더 사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된다면, 지금 저를 불러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무조건 살려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 해도 믿음이 작습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역대하 32장 24~26절에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는데, 히스기야는 오히려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히스기야가 연장 받은 15년의 시간은 히스기야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15년 동안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히스기야는 교만해졌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아들 므낫세를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므낫세는 12세였을 때에 왕이 되었습니다.
므낫세는 왕이 되자마자 산당을 세우고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우상숭배를 제일 많이 했던 왕입니다.
만일 히스기야가 연장 받은 15년 동안 거룩하게 살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았다면, 아들 므낫세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면, 아들 므낫세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무조건 축복인 것은 아닙니다.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대로 죽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큰 환난과 시험을 이기며 사는 것도 좋고, 환난 중에 복음 전하는 것도 좋지만, 큰 환난과 재앙을 보지 않고 죽는 것도 축복입니다.
열왕기상 14장 1절에 보면,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열왕기상 14장 10~1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그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우상숭배를 많이 하여 저주 받은 왕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안이 저주 받을 집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만 구별하셔서 재앙을 보지 않고 죽게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생각하기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역대하 6장 8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생각을 잘 해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많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빨리 가시지 않으시고 지체하셨습니다. 만일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바로 가셔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면, 사람들은 나사로가 잠시 기절했다가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려고 공생애 기간 동안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4~29절에 보면,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이 없어도,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큰 믿음을 가지고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불을 받는 사람,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 설교를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보면,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위험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신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충성스럽게 들리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두 가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똑바로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똑바로 깨닫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항상 깨닫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깨달으면, 항상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우리 평생의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불러주시는 영광을 누리기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선한 뜻을 품고 살게 도와주옵소서.
성전을 지어 바치기 소원했던 다윗이 복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만 해도 복을 받는 놀라운 비밀을 붙잡고 복을 받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