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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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7-04 23:04 조회3,415회 댓글0건본문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2005년 09월 02일(금요철야)
본문 / 마태복음 26:6~7, 요한복음 12:1~8
본문 마태복음 26장 6~7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1~3절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며칠 전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시집 갈 때에 쓰려고 향유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향유의 가격은 3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노동자가 3백 일 동안 일해야 3백 데나리온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은혜를 충만히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뉴스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3세의 청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12~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드리려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냥 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리아에게 박수쳐주어야 합니다. 칭찬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한 일을 기념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8~9절에 보면, 제자들은 분개하여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5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를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보고 어떻게 분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사람들 앞에서, 마리아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분개하여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한 것을 가리켜 허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화를 냈습니다.
가룟 유다는 위아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스승으로 생각한다면, 스승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에서 분개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정말 허비한 것입니까. 가룟 유다의 행동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 성도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집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그 사람을 위해 1백만 원을 헌금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람이 헌금한 1백만 원을 받고 감사해했습니다. 그 돈으로 수술비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1백만 원을 헌금한 성도의 친구는 헌금한 성도에게 “무슨 이유로 1백만 원을 헌금했냐”라고 하며 야단쳤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 유익이 있겠습니까. 선한 일을 한 사람도 기분 나쁠 것입니다. 만일 도움을 받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힘들어하겠습니까.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할 때, 이것저것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런데 다 다릅니다.
쌍둥이라고 해도 생김새가 다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신앙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근본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믿음대로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따지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이 말하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할지라도 참고 말하지 않으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말이 많은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평안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는 순간부터 시끄러워집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많이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해도, 가만히 있으면 주변에서 그 사람을 굉장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시험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시험거리가 생겼을 때, 그것을 가지고 말하고 문제를 삼기 시작하면, 시험거리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거리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시험거리가 생겼을 때, 입을 꾹 다물고 기도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처리해주십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입을 꾹 다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것보다 향유를 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돕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이 말한 대로 향유를 예수님께 붓지 않고 3백 데나리온에 팔아 예수님께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그 돈을 훔쳐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가리켜 “그는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와 같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악령입니다. 아주 악합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는 아주 악합니다. 이중적입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안에 그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탄이 가룟 유다의 안에 들어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안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고, 사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마귀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생각할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은 언제나 바릅니다. 바르게 하려고 생각하고, 좋게 하려고 생각합니다. 양심껏 하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생각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에게 나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음란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인가, 마귀로부터 온 생각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 아니라면, 그 생각을 대적해야 합니다.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로부터 온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 물리치지 않고 그 생각을 계속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악한 생각을 계속하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생각을 계속하면, 사람이 음란해집니다. 비양심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비양심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만큼 생각의 영향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좋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천군 천사가 박수 칠 만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새가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가는 생각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우리는 나쁜 생각을 쫓아야 합니다.
나쁜 생각을 그대로 품고 있으면, 생각이 머리에 둥지를 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그 사람을 그런 인간이 되게 합니다.
가룟 유다의 안에 사탄이 들어간 것처럼, 사탄이 들어와 버립니다. 사탄이 그 사람을 장악합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를 살펴봅시다. 가룟 유다는 도둑입니다. 돈밖에 모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향유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고 존경받을 만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철저히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렇습니다. 사탄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이단들은 자기들이 가장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 가장 영광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재산을 착취해서 그 사람을 망쳐버립니다.
이단의 실체를 알고 이단에서 나가려고 하면, 못 살게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단에 한 번 빠지면 신세를 완전히 망칩니다. 이단은 사탄이 사용하는 술수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도둑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우리가 받은 복을 모두 도둑질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영적으로 죽입니다. 멸망시킵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어떻게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가룟 유다는 속으로는 도둑질할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철저히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마귀의 속성을 가진 사람은 겉으로는 착하고 선한 것 같지만, 속에는 악독함이 있습니다. 부드럽게 말하지만, 속에는 악독함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대접한 것이 없으면서 예수님을 잘 대접하는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텐데, 가룟 유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이 얼마나 나쁩니까.
자신은 십일조 헌금도 하지 않으면서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들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이런 행동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을 많이 하면, 마귀처럼 행동합니다. 여러분은 절대 악한 행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헌금하는 것보다 사회사업,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구제사업, 사회사업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며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22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를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형제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만 하고 전혀 돕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돕는 것은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하는 것,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상급의 조건입니다. 구제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구제해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제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구제함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전 재산을 바쳐 좋은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아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니요,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므로 장차 천국에 가서 면류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깁니다. 복음을 들어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겨야 구원 받습니다.
구제하는 것은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조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제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구제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구제와 사회사업을 강조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들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깁니다. 복음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야 바르게 믿을 수 있고 구원 받습니다.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지만, 우선순위를 생각해서 더 중요한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구제를 많이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서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 듣고 상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됩니다. 구제할 때에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아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어려움이 많지만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사람을 보며 욕하지 말고 좋은 사람을 보며 감사하고 축복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때에 구제를 앞세우면, 전도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도우며 전도하면, 그냥 전도할 때보다 쉽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며 전도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기대하며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는 것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 전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구제하는 선행은 남을 생각하는 좋은 자세입니다. 우리는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남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적은 것이나마 돕고, 위로하는 말을 해서 그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해야 하는 선입니다.
선한 마음에서 나온 선이라야 참된 선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선한 마음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생각하는, 굉장히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악독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알고도 그런 짓을 했다면, 세상에 이렇게 악독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룟 유다가 선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작더라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일이라도 선을 행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여 선을 행할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여 선을 행할 수는 없다 해도, 작은 것이나마 실천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 전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할 때, 사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가룟 유다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악하게 만듭니다. 화나게 합니다.
우리는 사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도 생각해야 하지만, 마귀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사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반드시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사탄을 이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가룟 유다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살해버렸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배반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가룟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살해버렸습니다. 참 불쌍한 영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거듭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았다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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